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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러운 상식

대한제국 말기까지 잊혀진 한반도의 보물, 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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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이미지 참조)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대한제국 말기인 1907년.
창덕궁내에 일본이 만든 박물관 개관식.

고종 황제가 이 자리에
참석해서 둘러보는 와중
발견한 푸른 빛의 도자기.

궁금해진 고종은
일본 대사에게 질문했다.

"이 푸른색의 자기들이
고급스럽고 아름답군.
대륙의 것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려의 청자들이옵니다.

"?!. 짐은 이런 도자기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소.
그대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겠지....."

"........."

어떻게 된일일까요?

1. 고려청자의 발견


1876년 조선과 일본의
강제 통상조약인 강화도 조약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왔고
그들중에는 도굴을 주 목적으로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모든 산천에
즐비했던 묘를 샅샅이 뒤져서
오래된 물품을 강탈하고
일본으로 반출했던 그들은
이렇게 개성에서 고려청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종에게 보여진 고려청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1905년 을사늑약이후
일본의 주도로 본격적인
고려청자의 개발에 나서지만
원래의 제조 방식의 유실로 인해서
번번히 실패를 하게 됩니다.

(당시 고려청자의 제조 방식은
불교계에서 전승되고 있었으나
철저히 비밀에 부쳐집니다.)

옛 제조 방식을 완벽히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기에
전부 일본으로 반출해 버립니다.

이때의 고려청자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가
한반도가 광복을 하면서
그냥두고 간걸 현재까지 보관하고
지켜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1976년
전라남도 신안선과
서해 일대에서 고려청자는
물론 대륙의 송.원나라 시대의
수중유물들이 발견됨에 따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글 이미지 참조)
해양에서 출토된 유물들입니다.


2. 고려청자의 흥망성쇠.


청자의 시작은 대륙이었고
송나라시대때인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고려청자는 이에 대륙의
영향을 받아서 제작이 되었는데
오히려 원조인 송의 청자보다 더 뛰어나 아시아권에서는 최고의 도자기로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송나라때의 서책중에는
"고려의 비색은 천하제일."
이라고 하여 타지역에서는
결코 따라갈수 없다라고
표현할정도로 뛰어 났습니다.

야설로 당시 송나라의 한 지역성을
살수있다고 할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려말 안밖으로
내우외환이었던 고려는
결국 멸망하였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지우기에 나선 왕조는
조선백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청자는 한켠으로 밀리게 됩니다.

(구글 이미지 참조)
민무늬 조선백자

거기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민간에서의 청자의 기술력은
부분만 남기고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유일하게
청자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계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봉인시켜 버립니다.

3. 지금의 고려청자


서해일대에서 발견된 청자들은
고려청자의 제작의 실마리를 푸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에 경기도 이천과 전라남도 일대에서는 1970년대부터 청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라남도 강진군 일대는 고려청자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https://www.celadon.go.kr/

고려청자박물관

靑瓷 瓢形 注子청자 표형 주자 Celadon gourd-shaped pitcher

www.celadon.go.kr


전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최고의 도자기
고려청자.

현재와 미래의 유산으로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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